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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민들레 씨앗…연어처럼 고향으로
<추석 특집> 정선모 ‘풍요로운 계절의 정점’
기사입력  2019/09/11 [01:57] 최종편집    정선모 수필가

 

▲ 수필가 정선모   

 

연어처럼 고향으로 몰려드는 명절

 

아파트 입구에 있는 모과나무에 모과가 제법 굵어졌다. 올봄에 그토록 가물었고, 얼마 전 태풍 링링이 세차게 스쳐지나갔어도 저 모과나무는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 저렇게 튼실한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즐비한 가운데 의연히 매달려있는 모습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가을이 되어 다디단 과일과 빼곡히 여문 알곡들을 보면 이처럼 지난날의 힘들었던 모든 것은 절로 잊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오곡백과 무르익은 아름다운 계절에 한가위추수감사절과 같은 특별한 날을 정해 농사를 잘 짓게 도와준 하늘이나 조상님께 감사의 마음을 올렸다.

 

농사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겸허한 마음으로 천지신명에게 감사의 예를 올리는 것이다.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의 명절은 만남에서 시작한다. 민들레 씨앗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연어처럼 고향으로 몰려드는 명절에는 저마다 핏줄 당기는 대로 달려간다.

 

주차장이 된 도로 위에서 오랜 시간 운전해도 고단한 줄 모르고 고향으로,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의 명절은 만남에서 시작한다.


 

송편 찔 솔잎을 따는 일부터

 

명절 중에서도 가장 기다려지는 명절은 풍요로운 계절 한가운데에 들어있는 한가위다.

 

먹을 게 늘 부족했던 예전에는 황금빛 들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배고픈 자식들에게 마음껏 먹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한가위를 맞이하는 어머니의 손끝에선 신바람이 났다.

 

장성한 자손들이 집안 가득 둘러앉아서 왁자글 웃음꽃 피우며 정담을 쏟아내는 흐뭇한 정경들이 집집마다 펼쳐지고, 음식을 장만하느라 풍기는 고소한 기름내가 골목에 가득했다.

 

한가위를 맞이하는 일은 집안 대청소부터 시작되었다. 온 식구가 나서서 그동안 집안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어머니는 송편 찔 때 쓸 솔잎을 따는 일부터 시작했다. 솔잎을 따기 위해선 집에서 30분 넘게 떨어져 있는 산에 가야 한다. 종종거리며 따라다니느라 힘들다고 투덜대면 솔잎에 쪄야 쉬 상하지 않는다며 깨끗한 솔잎을 따는 방법을 차근차근 일러주셨다.

 

온갖 동물로 빚은 송편

 

내가 예닐곱 살쯤 되었을 어느 해 추석 전날, 작은집인 우리 집에 사촌언니, 오빠들이 모여들었다. 대학생이었던 그들의 이야기에 끼이지는 못하지만, 괜히 기웃거리며 오빠들의 널찍한 등에 올라타는 재미를 톡톡히 누리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는 다 큰 조카들이 마냥 대견하신지 이것저것 먹일 음식들을 장만하느라 분주하셨다. 음식 할 손이 모자랐던 어머니는 양푼에 가득한 송편 반죽을 방으로 들여보내며 오빠들에게 빚어보라고 하셨다.

 

그 커다란 반죽덩어리는 순식간에 빚어졌다. 쪄달라고 내보낸 송편을 본 어머니는 기함(갑작스레 몹시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 넋을 잃음- 편집자주)을 하셨다. 소반 위엔 곱상한 송편 대신 동물농장이 펼쳐진 것이다.

 

장난기 심했던 오빠들이 토끼, , 돼지, 소 등 온갖 동물들을 빚어놓은 게 아닌가. 깨나 콩 같은 송편소들은 방구석에 고스란히 남겨두고.

 

오빠들은 자신들의 작품(?)들을 빨리 먹어보고 싶어 했다. 기가 막혀 꾸중도 제대로 못하고 어머니는 그 많은 동물들을 다 쪄냈다. 소를 넣지 않아 맛없는 온갖 동물들을 설탕에 찍어 먹으며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웃음보따리가 터졌다.

 

그해의 송편은 아무 곳에도 나누어주지 못했다. 바소쿠리 속에 소복이 담겨있던 동물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후부터 추석만 되면 어머니와 오빠들 사이에 송편을 빚겠다커니 안된다커니 하며 가벼운 실랑이가 일어나곤 했다.

 

올해도 난 송편을 빚을 것이다.

 

▲ 이제 곧 한가위다. 쌀가루를 온몸에 묻혀가며 올해도 난 송편을 빚을 것이다. 아이들과 조카들에게 반죽덩어리를 큼지막하게 덜어줄 것이다   

 

쿡쿡거리며 장난스레 동물들을 빚던 오빠들의 머리에 지금은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저마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사회에서 큰 몫을 담당하던 지금의 오빠들은 그때의 우리 어머니보다 늙었다.

 

오빠들은 알고 있었을까? 일 년에 한 번 만드는 송편을 죄다 못쓰게 만들어 놓았어도, 자신들을 보며 가슴 가득 뿌듯함을 느끼셨을 어머니의 마음을. 해마다 그런 송편을 빚어놓아도 좋으니 자꾸자꾸 모여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음을.

 

등록금이 없다고 동동거리는 조카를 위해 자주 금반지 빼어주면서도 공부 잘하는 모습에 마냥 흐뭇해하셨다는 것을. 그렇게 공부한 사촌오빠는 크게 성공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뵐 때마다 두둑하게 용돈을 쥐여드렸다.

 

요즘처럼 자식을 낳지 않는 세태를 맞이하고 보니 자랑스러워 할 자손이, 야단칠 자손이 있는 것만큼 든든한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싶다. 뿌려야 거두는 것은 단지 곡식이나 과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 배웠다.

 

이제 곧 한가위다. 쌀가루를 온몸에 묻혀가며 올해도 난 송편을 빚을 것이다. 아이들과 조카들에게 반죽덩어리를 큼지막하게 덜어줄 것이다.

 

삐죽삐죽 못난이를 만들어 놓아도, 조몰락거리느라 꼬질꼬질 까맣게 손때 묻혀놓아도 모른 척할 것이다.

 

참기름 발라 고소한 송편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자신들이 만든 못난이 송편을 골라 먹어도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자라고, 정을 쌓아가며 가족의 울타리는 단단해질 것이다.

 

! 정답고 고운 모습들을 얼른 보고 싶다.

 

<프로필>

- 수필가, 도서출판SUN 대표

-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 수상: 한국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현대수필문학상

- 수필집: <빛으로 여는 길>(1995), <지휘자의 왼손>(1999)

<바람의 선물>(2003), <너를 위한 노래>(2018)

- 수필선집: <아버지의 기둥>(2011)


원본 기사 보기:해피! 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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