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 >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광고
'반세기 전’ 서독으로 파견된 임옥진 간호사의 인터뷰(1부)
기사입력  2019/12/09 [16:52] 최종편집    소정현기자

한국을 떠날 때 실업률은 40% 육박, 국민소득 79달러선

상업차관 은행지급 보증조건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 파견

 

7남매 맏언니로서 어려운 가정의 부모님 경제난도 결단

일상적인 내핍생활, 가족들 떠올리면서 송금하는 큰 기쁨

 

 

▲ 1970년대 파독 간호사 생활을 담담히 회고하는 임옥진 여사     

 

 

파독 간호사로 파견되었을 당시의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에 대해 말씀하여 달라. 그리고 파독은 국가적 난국 타개의 대용단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을 떠난 시점의 상황은 우리나라 당시 실업률이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 (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습니다.

  

1930년 전북 김제 출신으로 해방 후 독일 경제학 박사 1호인 현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KID)원장은 대한민국 경제 신화의 숨은 주역(主役)’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최빈국 중에 하나였던 시절' 파독 광부·간호사들의 월급을 담보로 받아온 15천만 마르크(당시 3천만 달러)의 경제협력 차관은 경제 발전의 디딤돌이 됐습니다.

 

1961112일 한국과 서독은 역사적인 3,000만 달러 규모의 경제협력 차관 제공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습니다. 1960년 한국은행 외환 보유고가 15,700만 달러였으니 3천만 달러는 우리나라 외환 보유고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난관은 다시 등장했습니다. 경제협력 차관을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지급보증 문제에 부딪쳤던 것이지요. 당시 서독 정부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해서는 제3국 은행의 지급보증 이행 약속이 있어야 했습니다.

 

▲ 1964128일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총리와 박정희 대통령을 통역을 맡은 백영훈 박사.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전 세계 그 어떤 은행으로부터도 지급보증을 받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진통 끝에 성사되었는데, 차관 제공의 담보로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파견한다는 내용이 명시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한국 경제 개발에 매우 중요한 종자돈과 초석이 되었습니다.

 

당시 가정의 가난과 경제난도 서독행을 촉진시킨 것 아닌가? 반세기가 지났어도 보람과 감회가 여전히 생생할 것 같은데?

 

그런 배경의 연장선상에서 비행기 자체를 타기도 어려운 시절, 197056, 저는 독일 행을 감행하게 됩니다. 나라 및 가정의 가난과 경제적 위기가 저게는 도리어 기회가 된 셈입니다.

 

선망하고 동경하던 선진국에 취업을 하고 경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하나의 모험이었지만 또한 행운이기도 했습니다. 해외생활을 통해 원하던 공부도 하고 나의 삶을 개척할 수 있었으니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기회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 왼쪽부터 남동생 임병환, 독일 거주 임정희,필자(언니) 임옥진,오른쪽 임영희.  1980115일 한국에 돌아 왔을 때 가족 구성원들이 바르게 자라 사회에 진출하여 사회 곳곳에서 정의롭고 자신감 있게 활동하는 모습이 기특하였습니다   

 

편지 내용에서 보듯 가슴 아프고 답답한 마음으로 가족과 나라의 형편을 염려하게 됩니다.부모님과 남은 여섯 형제들의 경제적 기반 및 정신적, 영적 성숙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혼신을 기울이게 됩니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서 더 보내고 싶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기쁨과 주어진 삶의 의미로 여기게 됩니다.

 

1980115일 한국에 돌아 왔을 때 가족 구성원들이 바르게 자라 사회에 진출하여 사회 곳곳에서 정의롭고 자신감 있게 활동하는 모습이 기특하였습니다. 나라도 경제적으로 점차 일어서고 있는 모습이 가슴 뿌듯하였습니다.

 

그래 헛되지 않았어. 이것이,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온 힘을 다해 경제적, 정신적, 영적으로 뒷받침한 것에 대한 나의 보상이야, 목표 달성이고, 보람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마땅히 할 일인데 참으로 잘 하였구나라는 위로감과 흡족함을 느꼈습니다.

 

▲ 동생 정희는 현재 48년간 서독 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정희는 19711021, 저보다 약 16개월 후에 독일에 도착하였습니다  

 

 

▲ 당시 독일 신문에 소개된  '동방의 천사 '임정희 여사 (왼쪽)

현재 서독의 본에 거주하고 있는 동생 정희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하여 달라. 동생도 언니의 길을 뒤따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 동생 정희는 현재 48년간 서독 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정희는 19711021, 저보다 약 16개월 후에 독일에 도착하였습니다. 독일 본 대학 병원에 배정되어 17년 동안 근무하고 이후 교회 간호사와 심신 클리닉의 상담(간호)사로 일했습니다.

 

동생은 딸이 초등학교 들어갔을 당시 1년을 쉬며 뒷바라지했던 것을 제외하면, 2016101, 64세로 은퇴하기까지 45년 동안 쉼 없이 근무를 하였습니다. 일을 하는 동안에도 공부하기를 쉰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동생은 늘 한없는 학구열에 불탔습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진학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공부에 대한 의욕과 열정이 늘 남달랐습니다. 동생은 독일에서 열정을 가지고 자기 성취를 위해 자신을 절제하며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기회를 잘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독일 남편도 만나고 독일 사회에 깊숙이 적응하게 된 것 같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정희 동생에게 독일어를 어떻게 독일인보다 더 함축적이고 능수능란하게 표현을 그렇게 잘 하느냐? 독일에서 태어났느냐?”라고 의아스런 표정으로 질문을 하곤 합니다. 독일 사회에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고 자신감 있게 주류 사회에 정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있던 베를린은 당시 동독 안에 있는 섬과 같은 도시로서 1970년대 초반에는 비행기로만 서독 본과의 왕래가 가능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는 규제가 풀려 기차와 버스로도 오갈 수 있었습니다. 비록 거리로는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독일 땅에 있어 든든하고 때로 직접 오가기도 하고 수시로 전화로 소통하며 서로에게 큰 힘과 우군이 되었습니다.

 

▲ 동생 정희는 독일 사회에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고 자신감 있게 주류 사회에 정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동생은 비록 거리로는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독일 땅에 있어 든든하고 때로 직접 오가기도 하고 수시로 전화로 소통하며 서로에게 큰 힘과 우군이 되었습니다. 가운데 오른쪽 동생 정희, 바로 위 필자(옥진 언니)   

 

 

당시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대가족의 맏이로서 가장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즈음 한국사회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근대화 물결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던 시대였다. 1970년대 초반 전반적 한국사회 분위기는 어떠했는지?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한국사회는 6.25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낙후된 농경사회였습니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공업사회로 전환하려는 근대화 물결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대였습니다. 가정마다 식구들이 많아 한 사람의 입, 밥 식구를 줄이는 것마저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공장이라든가 취업할 수 있는 산업화의 기반이 없었기에 젊은이들 특히 형편이 어려운 집안의 딸들은 식모살이, 재봉공장, 버스 차장 등으로 뛰는 형편이었습니다. 남아선호 사상으로 아들들은 보다 의욕적으로 공부시키고 상대적으로 딸들은 제외되는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부모님께서 든든히 여기시는 위로 오빠가 있어 맏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늘 부모님의 입장을 헤아리게 된 것 같습니다. 아마 5, 6, 아주 어린 시절, 영상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평생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 다음으로 28개월 뒤에 쌍둥이 여동생들이 태어났습니다.

 

지극히 가난했던 시절, 아버지 임상길씨 어머니 김귀례씨! 앞줄 왼쪽 오빠 임대진, 앞줄 오른쪽 필자 임옥진! 아버지가 안은 아기 임영희, 어머니가 안은 아기 임정희 , '정희와 영희는 쌍둥이' 

 

엄마는 식사준비를 마치고 맨 나중에 겨우 방안에 들어와 식사를 하려고 합니다. 배고픈 동생들은 젖을 먹으려고 둘 다 동시에 엄마의 양쪽 가슴에 파고들어 매달리고 엄마는 겨우 겨우 간간히 손을 뻗쳐 식사를 하시는 모습입니다.

 

어린 내가 느끼던 그 애처로운 마음은 평생 그리고 지금도 생생한 듯합니다. “어쩌나, 우리 엄마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우리 엄마 도와야지...” 아마도 이후로 늘 엄마의 편에 있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어머니는 자주 한 달에 3천원의 고정 수입만 있다면 살 것 같다.”, 매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자녀들을 잘 챙기고 싶어 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이 곧 저의 마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절박한 상황을 인식한 저는 가정을 돕고 자신을 향상시키고 자아성취 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기회로 여기고 갓 만 20세의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서독행이라는 돌파구를 선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가정 경제에 크게 일조하게 되었습니다.

 

▲ 아버지 임상길씨 어머니 김귀례씨갓 만 20세의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서독행이라는 돌파구를 선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가정 경제에 크게 일조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적지 않은 금액을 송금하려면 일상적인 내핍 생활이 생활화 되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송금 및 제반 서류를 보내고 확인하는 절차 또는 절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우리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을 절감한 이후 독일사회에 들어와 생활해보니 한국에 비해 당시 화폐 가치가 높은 1마르크가 우리 가정에서는 매우 큰돈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조금 더 근검절약하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절약생활의 고달픔은 저리 멀리 떠나고, 내핍생활은 당연한 일처럼 일상화 되었습니다.

 

한참 멋을 부릴 나이인데 얼굴 치장, 머리 손질은 어찌했을까요? 독일 미장원 요금은 가격이 대단히 높았습니다. 독일생활 약 8년 동안 단 한 번 미장원에 갔다면 믿어질까요? 친구들 간에 서로 커트해주기, 파마해주기, 백화점에서 옷감과 함께 본을 사서 예쁜 옷 만들어 입기, 연금 저축 등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매월의 급여를 고스란히 고국의 가족에게 송금하게 되었습니다.

 

 

▲  나 자신이 조금 더 근검절약하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절약생활의 고달픔은 저리 멀리 떠나고, 내핍생활은 당연한 일처럼 일상화 되었습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매월의 급여를 고스란히 고국의 가족에게 송금하게 되었습니다 

 

모아진 돈을 보낼 때는 병원 근무시간과 은행 업무시간이 겹칠 때가 많았습니다. 어떻게든 일정을 만들어 은행을 찾아 복잡한 제반 서류를 작성했습니다. 송금 및 한국에서의 인출 절차도 까다롭고 번거로웠습니다. 한국에서는 통신시설이 발달되지 않아 보내 놓고 반드시 편지로 알려 주어야 중간에 사고는 없는지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두어 번 송금사고가 있어서 결국 찾기는 했으나 수 개월간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가정의 걱정을 덜어주고 이 돈을 받고 기뻐하실 부모님과 가족을 떠올리면서 송금하는 기쁨이 매우 컸습니다. 서신으로 돈을 보낸 소식을 전하면서 그 동안 쌓였던 그리운 마음을 소통하였습니다.

 

지금이야 한국사회는 어느 정도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50년 전 서독은 이미 선진국이어서 한국과는 모든 면에서 비할 수 없는 국가였다. 문화적 충격이 상당했을 것 같은데?

 

첫째, 당시 우리나라는 땔감 부족으로 산림을 마구잡이 훼손하다보니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이었는데 ,독일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렀는데도 잘 가꾸고 다듬어 보존된 자연 환경이 눈에 띄었습니다.

 

집안에서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양변기가 있는 수세식 화장실, 전기나 가스를 사용하는 조리대와 오븐 등 생활하기에 편리한 식생활 구조와 조리 도구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시간적 낭비를 줄이고 간편하게 요리를 할 수 있는 식생활 구조가 여성들이 생활하기에 참 좋은 나라로 느꼈습니다.

 

장보기에서는 당시 한국에서처럼 매번 묻고 흥정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생략된 체, 마트나 백화점에서 진열된 물건들이 포장되고 정가가 붙어 카트를 끌고 다니며 필요한 만큼 자유롭게 담아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모습은 너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또한 배정받은 베를린자유대학병원은 첨단 의료 장비들로 채워져 선진화 된 상태가 너무 부러웠습니다. 교통시설로는 널찍한 2층 버스에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서 가는 여유로운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인파로 가득하여 차장이 내달리는 버스 문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당시 한국 버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아우토반을 위시해서 시간에 맞춰 운행되는 버스, 우반(지하철), 스트라센반(국철) 등 교통의 편리함이 돋보였습니다.

 

다음으로 교육의 혜택을 들 수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저의 경우는 취업과 동시에 3개월 동안 근무하지 않고 괴테 어학원에서 독일어를 배우는 혜택이 주어져서 무척 감사했습니다. 필요를 느껴 나중에 개인적으로 하르트낙 어학원과 괴테어학원에서 좀 더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언어적으로 소통이 가능해지니 독일 사회에 보다 빨리 적응하게 되고 독일 동료들 및 환자들과의 관계가 자신감 있고 원활하게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언어적인 재능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외국어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저런 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매주 정규적인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 전담으로 통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 직업 능력 향상을 돕기 위해 마련된 교육제도인  '베루프스베글라이텐드 아우스빌둥'(Berufsbegleitend Ausbildung)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동일한 급여를 받으며 다른 독일 학생들과 일체 똑같이 공부하는 제도입니다   

 

언어를 어느 정도 익히니, 자유대학병원에서 정간호사 취득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간호조무사의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 혜택으로 그 직업 능력 향상을 돕기 위해 마련된 교육제도인 베루프스베글라이텐드 아우스빌둥’(Berufsbegleitend Ausbildung)을 잘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동일한 급여를 받으며 다른 독일 학생들과 일체 똑같이 공부하는 제도입니다. 정간호사 과정을 규모가 방대한 대학병원의 풍요로운 교육 환경 속에서, 수준 높은 다양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제게 넘치는 축복이었습니다.(2부에서 계속됩니다.)

 

임옥진 프로필

독일 베르린 자유대학병원 근무

英國 The Bible College of Wales 졸업

한국여자신학교 영어교수

<역저> ‘영적인 싱글

하나님의 능력과 연결되는 믿음

당신의 교회는 준비되어 있는가?’

 

 

광고
ⓒ 모닝선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밴드 밴드 구글+ 구글+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서울>
* 강남구 * 강동구 * 강북구
* 강서구 * 관악구 * 광진구
* 구로구 * 금천구 * 노원구
* 도봉구 * 동대문구 * 동작구
* 마포구 * 서대문구 * 서초구
* 동구 * 성북구 * 송파구
* 양천구 * 영등포구 * 용산구
* 은평구 * 종로구 * 중구
* 중랑구
<수도권>
* 고양시 * 광명시 * 광주시
* 구리시 * 군포시 * 김포시
* 남양주시 * 동두천시 * 부천시
* 성남시 * 수원시 * 시흥시
* 안산시 * 안성시 * 안양시
* 양주시 * 오산시 * 용인시
* 의왕시 * 의정부시 * 이천시
* 파주시 * 평택시 * 포천시
* 하남시 * 화성시
 
 
 
 
* 경기 * 강원 * 경남
* 경북 * 충남 * 충북
* 전북 * 전남 * 제주
 
 
광고
광고
* 청와대 * 감사원
* 국가정보원 * 방송통신위
* 국무총리실 * 법제처
* 국가보훈처 * 공정거래위원회
* 금융위원회 * 국민권익위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 기획재정부
* 국세청 * 관세청
* 조달청 * 통계청
* 교육부 * 외교부
* 통일부 * 법무부
* 대검찰청 * 국방부
* 병무청 * 방위사업청
* 행정안전부 * 경찰청
* 해양경찰청 * 문화체육관광부
* 문화재청 * 농림축산식품부
* 농촌진흥청 * 산림청
* 산업통상자원부 * 중소벤처기업부
* 특허청 * 보건복지부
* 환경부 * 기상청
* 고용노동부 * 여성가족부
* 국토교통부 * 철도청
* 해양수산부 * 소방청
* 국가보훈처 * 대통령경호처
* 식품의약품안전처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 행복중심복합도시건설청
많이 본 뉴스
* 미래통합당 * 더불어민주당
* 국민의당 * 정의당
<방송사>
* KBS * MBC * SBS
* CBS * EBS * 경인
<신문사>
* 조선 * 동아 * 중앙
* 한국 * 국민 * 경향
* 서울 * 문화 * 내일
* 한겨례 * 매경 * 한경
<방송>
* 자유북한방송 * 자유조선방송
* 자유아시아방송 * 열린북한방송
* 북한개혁방송 * 통일방송
* 동포사랑
* 전국경제인연합회 * 대한상공회의소
* 한국무역협회 * 중소기업중앙회
* 한국경영자총협회 * 전국은행연합회
* 중소기업진흥공단 * 중소기업청
* 신용보증기금 * 기술보증기금
* 중소기업 정책자금 * 한국 엔젤투자협회
* 한상네트워크 * 코트라 홍콩무역관
* 홍콩한인 상공회 * 중국 한국상회
* 한중협회 * 한중민간경제포럼
* 중국 거시정보망 * 차이나코리아
<포탈>
* 바이두 * 소후닷컴
* 왕이닷컴 * 시나닷컴
* 텅쉰왕 * 텐센트
* 위챗
<전자상거래>
* 알리바바 * 한국관
* 텐마오 * 한국관
* 타오바오 * 알리페이
* 알리익스프레스 * 쑤닝이거우
* 웨이핀후이 * 징둥상청
* 뱅굿 * 미니인더박스
* 올바이 * 1688 닷컴
<언론>
* 인민일보 * 신화통신
* 환구시보 * 중앙TV
<은행>
* 공상은행 * 건설은행
* 농업은행 * 중국은행
* 초상은행
 
 
* 경실련 * 참여연대
* 한국소비자원 * 한국소비자연맹
* 소비자시민모임 * 소비자상담센터
* 소비자피해신고 * 녹색소비자연대
*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 주부클럽연합회 소비자고발센터
 
 
 
 
* 가톨릭대 * 건국대 * 경기대
* 경희대 * 고려대 * 광운대
* 국민대 * 동국대 * 명지대
* 삼육대 * 상명대 * 서강대
* 서경대 * 서울대 * 성균관대
* 세종대 * 숭실대 * 연세대
* 외국어대 * 중앙대 * 한성대
* 한양대 * 홍익대
* 서울교육대 * 서울산업대
* 서울시립대 * 한국체육대
* 방송통신대
 
 
 
 
<은행>
* 한국은행 * 국민은행 * 우리은행
* 신한은행 * 하나은행 * 외환은행
* 기업은행 * 씨티은행 * 제일은행
* *HSBC * 경남은행 * 대구은행
* 광주은행 * 부산은행 * 전북은행
* 제주은행 * 농협 * 수협
* 신협 * 새마을 * 우체국
* 산업은행
<카드사>
* 비씨카드 * 삼성카드 * 현대카드
* 롯데카드 * 국민카드 * 우리카드
* 신한카드 * 농협 * 씨티카드
 
 
 
 
* 서울대병원 * 연세대세브란스
* 고려대의료원 * 삼성서울병원
* 삼성의료원 * 경희의료원
* 한양대병원 * 인제대백병원
* 가톨릭중앙의료원 * 이화여자대의료원
* 하나로의료재단 * 서울적십자병원
* 원자력병원 * 한국산재의료원
* 차병원
 
 
 
 
* 로엔 * SM * YG
* JYP * B2M * CCM
* YMC * DSP * GYM
* 큐브 * 스타십 * 빅히트
* 울림 * 티에스 * 티오피
* 젤리피쉬 * 스타제국 * 플레디스
* 엠에스팀 * 페이스엔 * 벨액터스
* 쟈니스 * IOK * 쇼브라더스
 
 
 
 
* CJE&M * 인디스토리
* 쇼박스 * 데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