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의 잠을 깬 황금바둑판(26)

● 집성촌처럼 사속을 이어온 곳이었다.

김 교수가 여명대사를 만나고 간 사흘 후에 다시 백동마을로 촌장을 찾아갔다. 백동마을은 백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지은 마을 이름인데 실제로 거기가 승지(勝地 옛날 전란을 피해 피신했던 피난처)로 백제가 멸망하던 해에 몇 차례에 걸쳐 백제 인들이 피난해 마치 집성촌처럼 사속을 이어온 곳이었다.

이미 여명대사를 통해 김 교수가 장차 현대판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체인 구문보회의 새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소식을 귀띔이라도 받았는지 백수가 가까운 촌장이 정중하게 그를 맞았다.

하운거사의 안내로 일행 넷은 마을 뒤 숲속 길을 이십여 분간을 걸어 거대한 봉분이 있는 묘역에 도착했다.

그 묘역은 딱 어느 왕릉처럼 보였다. 짧지만 홍살문으로부터 봉분까지는 신도(神道)와 어도(御道)가 깔려있고 그 중간쯤에 수복(守僕) 방을 닮은 집이 있으며 묘 앞에 서있는 문무석이며 석등, 그리고 상석(床石)이 외관상 왕릉을 빼닮았다.

그들이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네 명의 사내(그들은 하운거사가 거느리고 있는 미사리들로 마을사람들은 ‘구다라 혼의 신전’을 지키는 산매(山魅, 귀신)이라고 불렀다. 그들 둘은 수복 방 입구를 지키고 다른 두 명은 앞장서 안내했다.

그 수복 방 안에서 문을 따고 지하계단을 내려가자 지하도가 나타났는데 묘 까지 난 길이었다. 그 통로를 따라 이십여 미터를 가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한 미사리가 커다란 자물쇠의 다이얼을 돌리고 물러서자 다른 미사리가 똑 같이 네 자리 번호를 돌렸다. 그리고 물러나자 하운거사가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미사리들이 좌우로 갈라져 들고 온 횃불로 벽에 걸린 횃불에다 불을 붙였다. 갑자기 사위가 환해졌다. 하운거사가 일렬로 서서 자기를 뒤따라 올 것을 당부했다.

앞에 해자처럼 생긴 물길이 있는데 한 사람만이 건널 수 있는 좁은 나무다리를 통해 그 해자를 건너게 되어 있었다. 그 다리는 평소 분리돼 있는 것으로 미사리가 뭔가를 조작해서 연결했다. 그만큼 안전장치가 철저해 외부인의 침입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해자를 건너 다시 십여 미터를 걸어가 나타난 문을 이번엔 하운거사가 직접 자물쇠를 따고 열었다. 그리고 미사리들이 돌아가며 벽에 걸린 등불을 켜자 일거에 전경이 드러났는데 한 마디로 경이였다.

상상외로 그 저장 공간은 넓었으며 시설이 훌륭했다. 외부공기가 유입되는지 실내는 매우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수많은 유물들이 질서정연하게 전시돼 있어 김 교수는 탄성을 베어 물며 도시 백제망국민들의 한이 저토록 천추의 세월을 변함없이 살아왔던 가 놀랐다. 자신이 그런 저들의 지도자가 된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뛰었다.

하운거사가 초막처럼 지붕만 씌운 집으로 다가가 일행을 둘러본 후 말없이 거기 놓인 나무탁자 위에서 씌운 비단보를 벗겼다. 그 순간 그 물체에서 치솟는 강렬한 빛에 모두들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수초를 수분처럼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들은 그 네모난 물체가 황금바둑판이라는 사실에 경탄해 벌어진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한동안 할 말을 잃은 채 서 있었다.

하운거사가 침묵을 깼다.

“너무나 조심스러워서 겉만 깨끗하게 닦아냈을 뿐 내부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김 교수가 우리 중에 가장 전문가시니 내부에 무엇이 들어 있나 살펴보시지요.”

김 교수가 면장갑을 꺼내 끼고는 바둑판 앞으로 다가가 목례를 한 다음 미사리에게 등불을 가까이 비추도록 일렀다. 그리고 찬찬히 사방을 돌아보았다.

기반(碁盤)의 크기는 여니 바둑판보다 약간 큰데 특징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직사각형으로 모양새가 보통 바둑판과 달랐다. 아마도 왕과 대좌해서 바둑을 둘 때 임금과 신하 사이를 떨어트려 안전거리를 유지하게 할 목적이었던 같았다.

바둑판의 몸체는 묵직한 오목(烏木)인 흑단(黑檀)나무로 되어 있고, 네 개의 다리는 우유 빛 나는 대리석으로 만들고 왕실의 상징인 쌍룡의 승천하는 용트림을 조각했다. 한 바둑판에서 세 가지 빛깔이 조화를 이뤄 내는 색깔이 가히 예술적이었다.

바둑판 바른 쪽 귀퉁이에 뚜껑을 여닫는 바둑알 통이 있는데 그걸 열자 속에 비취색 바둑알과 흰색 바둑알이 들어 있었다. 비취색 바둑알은 진짜 비취를 다듬어 만든 것이고 흰색 바둑알은 상아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그가 바둑알 한 개를 꺼내 판 위에다 놓았다. 이상하게도 비취색 바둑알과 달리 상아색 바둑알은 부딪히는 맑은 소리를 냈다. 그가 사학자답게 왕과 대국자 사이에 거리를 띠운 것이나, 대국자의 동태를 자연스럽게 감지할 수 있도록 포석하는 소리를 내게 한 게 다 암살 같은 사고를 예방하려는 방편임을 설명했다.

이어 바둑판에 그린 씨줄과 날줄을 살피던 그가 판의 사방 측면에서 작은 서랍을 발견했다. 십여 개의 서랍 속에는 금붙이며 진주, 비취, 호박, 사파이어 등 색색의 보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보석함은 왕의 자리로 보이는 쪽에만 있었다. 아마도 대국자한테 왕이 상으로 하사하는데 쓰인 것 같았다.

그가 고조되고 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대국 때 정면에 해당하는 측면을 살폈다. 더듬던 그의 손끝에 뭔가 돌출된 물체가 닿았다. 천천히 만져보니 무슨 잠금장치 같았다. 그가 그 장치를 앞으로 잡아당기자 뭔가 풀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가 가만히 양 모서리를 쥐고 앞으로 잡아당기자 커다란 서랍이 열려 나왔다. 그 속을 들여다 본 그가 미사리에게 비단보를 깔게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서랍 속 소장물건을 꺼냈다.

제일 처음 나온 것은 세 권의 책이었고, 두 번째의 것은 큰 봉투였으며, 세 번째의 것은 묶은 두루마리 양피지였다. 책은 왕실의 세계도(世系圖)와 가승보(家乘譜)를 담고 있었다. 두루마리는 왕족과 귀족들이 피신한 승지의 위치도와 금괴 등 왕궁으로부터 실어 보낸 보물목록과 은닉한 장소를 그린 지도였다.

그들 모두가 더욱 놀란 것은 유지로 된 대 봉투에서 나온 것들 때문이었다. 거기서 나온 것은 왕의 유언장과, 백제에서 암약중인 신라의 향간(鄕間) 명단과, 왕이 왜국으로 밀파한 왜국 지방통치기관인 22개의 담로 감독자 명단과, 고구려에 활약 중인 백제인 향간의 명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새御璽)가 나왔다.

역시 떠돌던 황금바둑판에 대한 풍문이 사실이었다. 그 유물들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넣은 다음 물러나 촌장 집에 모였다. 그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유언장 내용이었다. 그 내용에 따라 그때까지의 한일관계가 정당했던지 여부가 판가름 나는 건 물론 향후 관계에 있어 매우 중대한 방향의 수정이 일어날 것이며 한일 간에 추진하고 있는 동조일국의 핵심 사항인 왕위의 정통계승자가 어디에 있으며 왕의 위치가 어디가 될 런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 동종일국의 정통왕위계승자가 어디 있는가?

사실 한일이 한 조상의 후손의 나라라고 전제하고 벌이고 있는 동종일국의 정통왕위계승자가 어디 있는가에 있어 한국은 일본에 비해 불리했다. 많은 역사적 거증에도 불구하고 일본에는 천황이 존재하는데 비해 한국은 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속이 단맥 되었던지 백제왕위의 계승자에 대한 정보도 확보된 게 없어 의자왕의 후손이 살아 있는지를 알 길이 없었다.

만약에 적통 사속이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이뤄졌다고 입증이 될 경우 한국 측이 포기해야 될 게 많았다. 동조일국이 실현될 경우 왕은 일본에 위치할 것이며 백제보물 등 모든 왕실 재산과 유물을 일본에게 넘기도록 되어 있었다.

일본 측과 합의한바 때문이었다. 만일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백제의 왕위계승 순서에 관해 유언을 남길 경우 한일 양국의 모든 관계자들은 무조건 승복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적장자를 찾지 못하면 왜국으로 망명해 왕위에 오른 의자왕의 이복동생인 교기 대군(천지왕)의 후손에게 정통계승권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때문에 그 이튿날 철저한 보안조치 하에 김 교수가 다시 ‘백제혼의 신전’으로 가서 유언장을 꺼내 판독했다. 그리고 작업을 대충 끝냈을 때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내용이 불리했기 때문이었다.

촌장 집으로 모인 여명대사와 하운거사에게 유언장 내용의 줄거리를 설명했다. 우려했던 대로 한국에서 백제 왕위계승권 자를 찾을 수 없을 경우 일본에서 사속에 성공한 교기 대군, 천지왕의 후손이나 백제가 멸망한 후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벌어진 백강전투에 파병한 사이메이 여왕의 후손으로 적장자를 삼으라고 유언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그런 유언의 여파가 너무나 심각했으므로 모두들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모든 주도권이 일본 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정보에 의하면 일본 측에 매수된 정보원이 오래 전부터 암약하고 있어 적어도 황금바둑판의 발굴사실은 조만간에 간파돼 일본 측에 전달이 될 거라고 전제해야 되었다.

그런 상황을 듣는 순간 그는 어쩌면 이미 미사리 속에도 간자노릇을 하는 요원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한데 후에 드러나지만 그러한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백제보물 사냥에 혈안이 된 나카가와의 숨겨진 수족 엄승달이 개인적인 친소로 알게 된 미사리를 한 사람 매수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들은 숙의 끝에 당분간 유언장 발견을 비밀에 부치기로 합의했다. 김 교수역시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부분과 발표를 유보할 필요가 있는 자료가 있어 발설하지 않았다. 유언장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금괴 찾기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앞으로는 한일 양국 어디에 적통 후손이 생존해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었다.

김 교수의 앞날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을 조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