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예(苗裔) 밀담(30회)

● 에칸 주지스님의 소개로 온 사람입니다.

▲ 작가 朴又木

여명대사가 은둔하고 있는 잔사(殘寺)인 망보사(望寶寺)는 백제왕조 때에 왕가의 시주로 지었다는 소문이지만 그 진위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유장한 세월에 퇴락하여 불자의 발길은 끊기다시피 하였고 절 살림은 궁색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절 식구들한테는 조금도 궁기가 흐르지 않았다.

그 본당 옆으로 난 숲길을 따라 십여 분가량 길찬 숲을 올라가면 어느 순간 갑자기 꽤 가파른 돌계단이 나타나는데 그 끝자락에 낡은 암자가 나타난다. 그 암자가 귀천암(歸天庵), 주인이 망보사의 가장 어른스님으로 법명이 여명(如明) 이라고 알려졌을 뿐 연치는 물론 승랍(僧臘, 중노릇한 해수)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신비한 법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소문이 났다.

어느 날, 밤에 칠흑 같은 어둠속으로 손전등불빛이 떠오르더니 귀천암으로 오르는 돌층계 앞에 멈췄다. 불빛을 밟으며 한 여인이 나타나 계단을 올려다보고는 천천히 올라갔다.

“스님께 내가 왔다고 고하세요.” 그녀가 앞장선 남자에게 이르듯 말했다. 그 남자가 목례를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 방문 앞에 서서 “여명스님 계십니까? 에칸 주지스님의 소개로 온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들어들 오시오.” 동행자로 보이는 두 남자가 비켜서자 그녀가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백발에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승이 촛불이 놓인 다담상을 앞에 두고 앉아 들어서는 그녀를 응시했다. 눈빛은 부드러우나 강렬했다.

“에칸스님께서 소개하신 유키코라고 합니다.” “히노쿠마의 꽃이라는 분으로 들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중요한 사명을 띠고 온지라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자, 어서 앉으시지요. 암자라는 데가 참선하는 도장인지라 여간해서 손님을 맞아들이는 법이 없어 대접이 아주 부실하니 이해하시오. 차 대접으로 이 빈도(貧道)의 예의를 차릴까 합니다만.”

“큰스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시는 차를 마신다니 영광입니다.” 그가 가만히 미소 지으며 다기 일습을 꺼내 놓고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차를 끓이는 동안 가져온 전갈을 듣겠소이다.”

잠깐 그녀를 일별하고 거두는 그의 안광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그 역시 긴장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그럼 먼저 한 가지만 여쭈어본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이 궁금합니까?”

“제가 띠고 온 임무는 중대한 일입니다. 저는 히노쿠마존황회에서 일하는 간부입니다. 이번의 제 역할이 존황회가 지향하는 이념이나 방침에 배치되어서는 안 됩니다. 해서 먼저 에칸스님과 여명스님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미인은 경박하기 쉽다고 하더니 아키코 양에게는 해당이 안 되나 봅니다. 아주 신중하십니다. 그토록 원하시니 진실을 알려드려도 무방하겠지요.” “감사합니다.” “혹시 묘예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모릅니다만....” “그건 여러 대를 걸친 후손을 의미합니다.

● 항왜! 일본으로 망명한 도래인의 후손

또 항왜(抗倭)라는 게 무얼 지칭하는지 아십니까?” “아니요. 처음 듣습니다만....” “한국에서 사용하는 항왜란 임진왜란 때 조선침공군으로 출정한 일본군 장졸이 무고한 조선을 침략하는 데 항거하여 조선군에 항복하고 결국 조선인으로 귀화하여 살았던 사람을 일컫습니다.”

“아, 네에. 그런 역사적인 사실이 있었군요.” “그 항왜들은 임금이 하사하는 사성을 부여받아 각기 가문을 이뤄 살았는데 그 사속이 유장하게 이어져 어느 가문에서는 사대부가 대대로 났고 어느 가문에서는 애국지사가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일본의 침략전쟁이 무도하다 했어도 일본군 신분에 조국을 배신한 것은 매우 해연(駭然, 굉장히 이상하여 놀랍게) 할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단순히 의를 좇는 행동치고는 너무 극적이라는 의문이 드는군요.” “그런 이면에는 매우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사연이 있습니다.” “네? 무슨 그런.....”

“저들 항왜들은 대부분이 사실상 백제 귀족이 담로 관리의 신분으로 일본을 통치할 때 일본으로 이주하였거나, 백제가 망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이른바 도래인(渡來人)의 후손들입니다.”

“그렇군요.” “그야말로 한 많은 묘예들이지요. 그러므로 대를 이어 온 저들 혈통 속에는 사속의 피만 흐른 것이 아니라 망향의 그리움과 ‘구다라나이, 백제 것이 아니면 다 시시하다’는 자부심이 함께 천추의 세월을 맥맥히 흘러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조상의 나라를 유린하고 한 핏줄 동포를 살육하는 전쟁에 염증을 느꼈던 것이지요.”

“참으로 저들의 반역이 대의명분이 분명하고 그 용기가 가상하군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오면 그런 역사와 두 분 스님께선 어떤 연관이 있으세요?” 호기심어린 그녀의 시선이 차를 따르는 그에게 꽂혔다. 그가 잠시 망설였다.

“놀라지 말아요. 에칸 주지스님은 백제 귀족의 묘예이고, 나는 백제가 멸망한 후에 일본으로 망명한 귀족의 후손입니다. 말하자면 우린 기구한 운명적 관계의 묘예들입니다. 나의 선조 중에는 항왜도 계십니다.”

“어쩜! 참으로 기연이시군요.” “우린 ‘콩깍지로 콩 볶기’ 식의 장구한 한·일 간 갈등과 대립을 어떡해서든 끝내게 하는데 일조하기를 원합니다. 유키코 님은 많은 일본 역사학자들이 수긍하는 한일동조론(韓日同祖論)을 믿습니까?”

그건 일본의 개국신화에서 시조가 태양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개국설을 부인하는 것으로 일본의 조상의 나라는 한반도이기 때문에 결국 한국이나 일본의 조상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동조론(同祖論)의 해석이 언제부턴가 갈렸다. 이른바 ‘동조일국론’(同祖一國論)에서 일본중심 일국론과 한국중심 일국론으로 갈린 것이다. 일본은 온갖 역사 왜곡과 윤색을 통해 한반도는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며, 반대로 한국 측은 한반도가 조상의 나라이니 일본이 한국의 휘하에 들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모순되게도 동조론에 동의하고 믿으면서도 일본은 임진왜란에 식민지배 등 콩깍지(일본) 가지고 콩(한국)을 태우고 볶기를 계속해 왔던 것이다. 콩깍지의 주축 세력은 양국에 다 포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들 핵심세력이 백제출신 이주민과 망명객의 후손들인 것이다. 콩깍지 가지고 콩을 태우고 볶는다는 말이 괜한 과장이 아닌 것이다.

“물론 믿습니다만.” “한국이 일본의 조상의 나라인데 일본은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두 번에 걸쳐 한반도를 병과와 식민지배의 도탄 속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잘 알고 있어요.”

“문제는 지금도 일본에는 그런 세력이 또 다시 한반도를 병탄할 셈으로 갖가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황회에도 이른바 천손파(天孫派)라는 세력이 있어 자신들이야말로 한일 양국을 통틀어 정통이라며 동조일국론의 주도권을 쥐려고 암약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이 콩과 콩깍지처럼 본시 한 몸이라면 일본이 정세가 불안정하고 어지러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더구나 백제왕가의 피가 흐르는 황실은 일본에 건재해 있지 않습니까. 왕가의 사속이라면 일본에 그 정통 혈맥이 이어져 있으니까요.”

“허, 그런 인식과 신념이란 게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선 정한론(征韓論)이라는 발상만 보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무책임 했나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에 한반도가 병과로 쑥대밭이 되어 조선이 나라꼴을 되찾고 굶어 죽던 백성이 겨우 풀칠로 연명이라도 하는 데까지 전화 회복에 물경 1백년이나 걸렸다는 비극적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동조론을 믿는다면 저런 식으로 한반도를 병탄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어디 인간의 탈을 쓰고 조상의 땅에다 분탕질을 치고 도적떼처럼 유린한단 말입니까. 해서 우린 그런 비극의 재연을 막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믿으세요?” 유키코는 속으로 어쩐지 저 노회한 노승이 존황회에서 추진하려는 일련의 비밀계획의 실행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무력적 병탄을 할 수 없으니까 동조일국론의 명분과 정통성을 확보한다는 미명하에 천손파에서 백제가 멸망하면서 사라진 네 가지 보물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 보물이라 함은...” 그건 어새(御璽)와 기반(碁盤), 왕세보(王世譜)와 금괴를 말합니다. 그 보물을 확보하면 동조일국론의 확실한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 네에...”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존황파까지 나서 그 금괴를 찾으려 한다고 합니다.” “그건 낭설입니다. 아무리 황금에 눈이 멀었기로 존황회가 그렇게까지 타락할 수야 없지요. 그런데 제가 여기에 오기 전에 들은 소식입니다만 백제보물을 찾았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모르겠습니다.”

순간 수양이 깊은 데도 여명대사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부처님이 허락하시면 언제고 가능한 일이지요.” 하고 선 답 하듯 말했다. 그리고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최근에 존황회 회장이 바뀌었지요? 그 신임회장이 바로 기교사테이 출신이 아닌가요? 기교사테이라면 야쿠자와 야합해 기업하는 기업가이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