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제(34회)

 

● 숙명적으로 이렇게 가연을 맺게

 

▲ 작가 朴又木

저들이 물러가자 비로소 두 사람은 마주보며 누가 먼저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의 동시에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에 그것도 한국말과 일본말로 들은 거창하고 무겁기 짝이 없는 축하의 말을 마치 얼굴이 없는 탈이 들은 형국이었다는 게 새삼 우습고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로가 말없이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탈을 벗겼을 때 그미는 눈물을 흘리고 있고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고노에 님 아니세요?”

 

그 순간 그미의 시선이 당황한 듯 떨렸다. “놀라셨군요.” 그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라니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머 저도 놀랐어요. 여기서 교수님을 뵌 것도 행운인데 우리가 가연을 맺어 한 자리에서 차를 마시게 되었다니 기적입니다.” 그미는 모든 걸 자신이 꾸몄음에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었다.

 

“혹시 우리가 건곤의 바둑알을 지니고 대국자가 된 것이나 여기까지 오게 된 일련의 상황이 다 미리 계획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의혹이 그의 뇌리를 쳤다.

 

“아무러면 어때요. 중요한 건 우리가 숙명적으로 이렇게 가연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인걸요. 고백하지요. 실은 김 교수님을 대국상대로 지목한 게 저인 건 맞습니다.” “그랬습니까?”

 

“불쾌하신가 봐요. 여기에 김 교수님이 오신다는데 제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일방적으로 요청한 것입니다. 제가 지나쳤나요?” “여기에 온 것이 저의 선택이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만.”

 

“제가 아는 것을 조금만 말씀드리지요. 오늘 같은 조령제는 격년제로 지내는데 단순히 추모제를 지내는 게 아닙니다. 일본 측에서는 ‘비추카구라’(備中神樂: 신사에서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벌이는 연회) 같은 것으로 ‘신락(神樂)에의 초대’라고 부릅니다. 사실은 조상을 기쁘게 해드리는 게 진짜 목적이에요.”

 

“이를테면 바둑대국 같은 것 말인가요?” “네. 그걸 우리는 사속지망제(嗣續之望祭)라고 합니다. 한반도가 일본의 조상의 나라라고 믿고 단절된 혈맥을 이어가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속해오고 있는 이를테면 혈맥 잇기 행사에요.”

 

“그렇다면 바둑알 짝 맞추기를 왜 대국주명이라고 한 것입니까?” “양국이 번갈아 바둑알을 바꿔 쥐는데 올해가 한국 측에서 붉은 바둑돌을 쥐는 해라서 일본 측에서 여덟 개의 짚신을 준비해 온 것입니다.”

 

“꽃 이개를 이르는 것입니까?” 짚신은 일본에서 여자를 의미하는 은어이고 꽃 이개는 옛날 왕의 침소에 수청들인 여자를 의미했다.

 

“그렇습니다. 일본의 사람이고 문화고 심지어 제신들까지도 그 뿌리가 한반도 특히 백제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의 멸망이나 임진왜란 때에도 혈맥이 미일전쟁부터 시작해 한국전쟁을 치르며 끊기게 되었습니다. 해서 저희 존황회에서 혈손 찾기와 혈맥 잇기 운동을 60년대 초반부터 비밀리에 추진해오고 있어요.”

 

“그렇게나 오래 되었다니 놀랍습니다.” “그 혈맥 잇기로 태어난 세대가 벌써 불혹의 나이가 되었는걸요.” “그런 어떻게 보면 시대를 역행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언가요?”

 

“한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단호한 대답을 너무나 담담하게 들은 게 실감되지 않았다. “예? 한 나라라고 하셨습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뿌리의 나라가 백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사속의 종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존황회 내에 점차로 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일본이 종주국이 되어야 한다는 거군요

 

“일본이 종주국이 되어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백제 왕통은 지리멸렬되었는데 반해 백제왕가 혈통이 뿌리를 내린 일본 천황가문은 건재하잖아요.”

 

“아, 일리 있는 주장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제가 그런 주장을 지지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고노에 님께선 영지의 반딧불은 가슴만 태울 뿐 울지 않는다 하더니 아까 탈을 벗겼을 때는 왜 눈물을 흘리셨지요?”

 

“제 노래 알아들으시는 걸 보고 정말 기뻤는데 아까 갑자기 우리의 만남이 정말 대국주명님의 축복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나데요.” “이상하군요. 오늘 행사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신 것 같은데 반기는 기색은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

 

“제 질문이 지나쳤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짐작하시잖아요. 우리가 차(몸을 섞음)를 나눠 마시는 게 서로 사랑해서도 아니고 설사 수태를 한들 우리가 부부로 살 게 아니잖아요.”

 

“고백하겠습니다만, 난 여기 조령제에 필요가 있어 왔을 뿐 우연히 품안에 든 새를 만나 ‘일기일회의 차’를 나눠 마시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치른 모든 걸 후회하시나요?”

 

“아니요. 다만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난감할 뿐입니다.” “정 불편하시면 제가 방을 나가겠습니다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신분으로 여기에 오셨는지 모르지만 제관의 조심스러운 접대를 보고 존귀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두에게 실망을 줄 수 없는 처지임을 이해합니다.”

 

“사실 그래요. 제 자유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지요. 저는 제게 맡겨진 소임을 다 수행해야 하거든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진정 내키지 않으시면 하지 마세요. 우리가 제대로 초야를 치른 것처럼 행동하면 되잖겠습니까?”

 

“안돼요. 이 유키코는 구차스러운 거짓말로 대승(大乘)의 진로를 방해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우리가 서약한 대로 따랐다고 하면 안 될까요?”

 

“우리가 무슨 죄를 짓는 거에요?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고노에 님이 이 방을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저는 수치를 당한 몸이니까 자결해야 되겠지요.”

 

“예? 아니 그렇게까지...” “그 뿐만이 아니에요. 신성한 미쓰미네 신사의 신녀인 저를 결과적으로 욕보인 김 교수님도 벌을 면차 못하실 거에요.”

 

“그렇게까지 이 행사가 의의가 깊은 줄을 몰랐습니다.” “이곳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본시부터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지 어기면 우리가 인연을 맺게 축복한 신의 진노를 산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비한 인연은 우리의 결합을 찬동하고 있어요.”

 

그미가 감정이 북받치는지 목소리가 젖어 나왔다. “어떤 동기에서든 한 여자가 한 남자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결심이 무엇을 의미하나 정녕 모르시겠어요?” 그미의 목소리는 울음에 섞여 흐트러졌다.

 

그가 다가가 그미를 보듬어 안았다. 그미의 몸은 온통 뜨거운 불덩어리였다. 그미로부터 맹렬하게 타오르는 뜨거운 정염이 그에게로 번져 온 몸 여기저기에다 마구 불을 놓았다. 이성은 마비되고 모든 격의와 타산은 사라졌다.

 

그 대신에 격정의 손길이 떨며 옷을 벗기고 화염처럼 날선 혀는 뜨거운 입술을 열어젖혔다. 입술과 입술이 나비처럼 짝을 지었다 물러나기를 거듭하자 뜨거운 숨과 깨물린 단 소리가 뿜어 나왔다.

 

격렬한 애무를 버티고 버티다 못해 하나 된 둘이 포개져 금침으로 쓰러졌다. 그들로부터 일체의 거치적거리는 기속(羈束)이 사라지고 화려한 욕망의 마차가 대령했다. 그미가 ‘우리 마차에 타고 달려요.’ 하고 뜨겁게 속삭였다. 그미의 신성한 곳에 그의 삼대(麻骨, 남근)를 들이겠다는 신호였다.

 

드디어 합궁의 막이 오르고 꽃놀이가 벌어졌다. 육체의 모든 쾌락의 문이 열리고 탄식과 같은 찬사와 희열에 찬 교성과 시간의 정지를 염원하는 주문과 이 밤이 지새면 헤어져야할 이별의 슬픔이 한숨이 되고 환성이 되고 그리고 눈물이 되어 나왔다.

 

어지간히도 격렬한 꽃놀이에 지쳐 그들이 잠들었을 때 바깥엔 희미한 아침 박명 속으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가 깊은 잠에서 깬 때는 이튿날 거의 열 시가 다 되어서였다.

 

그미가 누웠던 잠자리는 정돈된 채 어디에서고 그미의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미가 떠났다는 정황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한여름 밤의 꿈이었든가 가슴에 허망한 구멍이 뻥 뚫렸다.

 

머리맡에 접힌 쪽지가 놓여있었다. “언제 다시 당신 앞에서 신무를 추고 짚신을 바칠 수 있을지 기약이 없군요. 그러나 어제 당신께 시들지 않는 토코하나(常花)로 피었던 유키코의 꽃은 영원히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령제에 다녀온 후 유키코에게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건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경직된 느낌과 교제 중인 하사카의 김강민과의 관계에 대한 노골적인 질투를 담은 비아냥거림이었다.

 

무엇보다도 도쿠야마가 남처럼 사는 사치코와 김강민의 관계를 들먹이며 은근히 그미 자신의 부도덕함을 상기시키면서 그미더러 김강민과의 깊은 관계를 이용하여 바둑판을 가져오라고 하는 강요였다. 그미는 갑자기 가시울타리 안에 갇힌 것 같은 고립감에 빠졌다.

 

존황회의 한국담당 운영위원인 도쿠야마는 다루기가 어려운 실력자였다. 그런 그의 귀에 한국에 심어놓은 밀정으로부터 황금바둑판이 발굴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이어 유키코가 한국을 은밀하게 다녀갔다는 정보가 들어온 것이다. 그는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이렇다 할 정보는 없었다. 그의 의심은 점점 깊어졌다,

 

그러던 차에 유키코가 조령 제에 참석하는데 동시에 김강민이 구문보회 회장으로 취임한다는 것이다. 그는 뛰어난 모사답게 유키코에게 성사하기 어려운 임무를 맡기면서 실패할 경우 둘 사이에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 파이도록 일을 꾸몄다,

 

유키코는 도쿠야마로부터 지시 받은 황금바둑판의 탈취 극을 세우느라 고심했다. 그가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실감나게 계획을 세워 행동에 옮기되 그미가 탈취극의 주역임을 알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여명대사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미는 깊은 밤으로만 다녀갔기 때문에 은밀하게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