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이제는 보내줘요. 더는 안 되겠어요….” “너무 두려워… 마음의 준비 좀 하고….” 희뿌연 눈으로 수정이 보챈다. 수년 전부터 이별을 통보해 왔으나 못 들은 척했다. 이별이 그리 쉽냐며 뜸을 들였더니 오늘은 새벽부터 조른다.
이별의 고통과 후유증을 가늠할 수 없어 더욱 두렵다. 세상에 아프지 않은 이별이 있을까. 어릴 적에 먹던 쫀드기만 해도 그렇다. 그것도 이별이라고 헤어지는 소리가 요란도 했다. 딱 달라붙은 것을 떼어내면 “찍!”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물며 나와 함께 와서 동체로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가. 스스로는 할 수 없어 결국 안과 의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마취약 넣습니다.” 간호사가 내 눈을 벌리더니 안약을 질금질금 떨군다. 순간 풀어헤친 검은 머리채 한 묶음이 휙 지난다. 눈물이 주룩 흐른다. 이쯤에서 슬퍼해야 하나? ‘강변에 버드나무야 울지 마라….’ 간호사가 솜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더니 안대를 씌운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가더니 침대에 눕힌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긴장 푸셔요. 백내장 수술 베테랑 의사입니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잔잔한 바람결이다. ‘음성이 봄바람이군요. 안정된 피치 톤과 속도가 신뢰를 주는군요. 제게는 이별이란 큰바람이 불어왔고 머뭇거리는 제 생각을 이미 뒤엎었네요. 의지의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두 눈을 맡기니 당신 마음대로 하셔요….’
도로로로 다라라라…. 레이저 바람을 타고 수정이 해체되어 떠난다. 부서지는 별빛이 현실 세계를 덮어 버린다. 수백만 광년 우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안녕! 늙은 내 등불이여…. 산산이 부서져 전설 조각으로 흩어지누나.
이제 너 어느 별로 가는 거니?’ ‘들어봐요. 바람 소리를…. 울지 마요. 그리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잖아요. 앞으로 마법 같은 세상이 올 거예요.’ ‘너와 함께 와서 세상과 마주하면서 마법은 이미 시작되었어. 너를 보내고 인공 수정체와 만난들 처음의 그 세상은 아니지. 너는 너무 많은 걸 보여주었어. 문제는 네게 너무 익숙했다는 거지.’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의사가 이 말을 반복한다. 두려움의 경계가 무너지고 신세계가 깨어난다.
각설하고, 저 파편 조각들이나 세어 볼까. 만상을 셀 수 없고 바닷가의 모래를 셀 수 없듯 불가능한 일이라 포기한다. 도로로로 다라라라…. 해금 가락에 가슴을 태우듯 기계 소리에 끌려다닌다. 이별 가락치고 부드럽기도 하지. 꽃망울 터뜨리는 소리가 들린다면 이와 같을까. 그나저나 도무지 내 눈을 어떻게 하는 걸까.
나는 지금 눈을 감은 건가 뜬 건가. 그조차 알 수 없어 천체의 시간을 의사에게 내어준다. 평화로워진다. 열리었으나 보이지 않는 하늘, 그 느슨함의 영험까지 체험한다. 이대로 누워 그 깊은 나라 어딘가에 내 주소를 부여하고 문패 하나 달아도 괜찮지 싶다.
“잘 보이시죠?” 이튿날 안대를 벗겨주며 간호사가 말한다. 인공 수정체가 마법을 실현한다. 회색이던 내 상의가 환한 베이지로 변했다. 기암을 토할 의술이다. 놀람은 이어졌다. 사람은 순간 만 가지 생각을 한다더니 밥솥을 열다 옛날 푸세식 화장실이 떠올라 흠칫했다.
‘밥솥에 구더기가 있을 리 없지.’ 하고 보니 하얀 밥알들이 쌀눈을 뜨고 빽빽하게 서 있다. 탱글탱글 알알이 존재감을 맘껏 드러내고 있다. 이리도 고울 줄이야. 세상엔 통쾌한 이별도 있었구나. 이별하기까지 고민은 길었으나 실행하여 종결하기까지는 두 눈 합쳐 30분이면 족했다.
사람들 얼굴을 보니 누구는 피부가 더 환해졌고 누구는 검버섯이 더 짙어졌다. 회색의 경계가 무너지고 진실의 세계가 깨어난 것이다. 나는 엷은 휘장으로 진실을 가리고 세상을 본 것이다.
진실이 아니었으니 잘못된 걸까. “하늘이 누렇게 보여. 모든 곳에 안개가 낀 것 같아.” 이쯤에서 노년에 백내장이 심했던 ‘클로드 모네’가 한 말을 가져와 되뇐다. 인상주의 화가인 그는 ‘일본식 다리’를 같은 위치에서 보고 여러 점 그렸다.
그런데 백내장이 심해지면서 작품 색상이 흐려진다. 하지만 모두 걸작품으로 승화하는 경지에 오른다. 희뿌연 그 풍경은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이었기에 주관적 시선으로 그린 거다. 현재에 진심이면 진실을 넘고 세기를 넘어 감동을 주기도 하나 보다.
눈이란 정녕 영혼의 창이라 했다. 진실을 가리고 보았을지라도 상대를 볼 때 주관적 시선에서 내 영혼이 내 마음이 지극했다면 후회는 없으리라. 엎드려 나를 톺아볼 시간이다. 나와 함께 와서 내 몸의 창 역할을 다하고 점점이 흩어져간 수정체를 제대로 사랑은 했는지, 고맙다는 말은 했는지, 소중함을 되새기기는 했는지를….
◪ 임미옥 프로필
제20회 동양일보신춘문예 당선
2020년 예술세계 수필 등단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수필집)
‘음악처럼’ ‘수필과 그림으로 보는 충북명소’
‘꿈꾸는 강변’ ‘내 마음 아직도 그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