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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작가 朴又木’ 혈맥(血脈) 2부 ‘묘예들의 해후’<28회>
기사입력  2021/06/07 [00:37] 최종편집    朴又木

그미 자신도 잘 알지 모하는 음모를 숨기고 있었다.

 

▲ 작가 朴又木    

탐방단이 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떠난 날 정오 무렵에 고노에로부터 김 교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행할 데가 있어 이틀간을 더 머물기로 하고 남았는데 혹시 안내를 부탁해도 될지 모르겠다면서 가부를 타진해왔다.

 

그미는 자신을 열렬한 기차여행 마니아라고 소개했다. 외국에 여행이라도 갈 때면 어김없이 그곳의 동호인 클럽과 접촉해 유별난 노선으로 기차여행을 즐긴다고 했다. 그리고 여명대사에게 길 안내자를 부탁했는데 공교롭게 그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나 그 이면에 그미 자신도 잘 알지 모하는 음모를 숨기고 있었다. 그런 음모자는 존황회 핵심간부인 도쿠야마였으며 그미를 탐방 팀에 단장으로 동행시킨 장본인도 그였다.

 

김 교수가 안내를 동의하면서 여정을 상의하러 그미가 묵고 있는 호텔 커피숍으로 오겠다는 시간약속을 하고 끊었다. 그미는 약속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마치 그 시각이 코앞에 바짝 다가선 것처럼 알 수 없는 조급증이 일었다.

 

목욕도 하고 머리도 만져야할 것 같았다. 거울에 얼굴을 디밀자 피곤에 시달린 피부가 윤기를 잃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실은 빼어난 미모는 여전한데도 마음이 산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불만족을 다 해결하기엔 시간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이게 자신도 모르게 질질 끌려가는 노처녀 독신자의 한계인가 한숨이 절로 났다. 근자에 없던 일이었다.

 

그만큼 그와의 만남은 단 하루의 동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체험해보지 못한 상당히 신선한 호감으로 그미에게 여성을 일깨웠다. 만날 시간 십분 전쯤 커피숍으로 들어서자 그는 벌써 와 있었다.

 

벌써 오셨군요.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리에 낯선 분더러 제게 오시라 할 순 없지요.” 그가 자리에 앉자 그미가 편지를 꺼내 그의 앞으로 놓았다. “히라타 교수께서 선생님에게 전하라면서 주신 편지입니다. 실은 그분이 제 가 일하는 단체의 자문위원이세요.”

 

, 그러셨군요. 그분께선 여전히 연부역강하신가요?” “웬걸요. 요즈음에 많이 쇠약해지셨습니다. 명예교수로 근무하신다지만 무거운 연치이신 걸요.”

 

그러고 보니 그분을 뵌 지도 이태가 넘었습니다. 제가 교토대학에 교환 연구원으로 이 년간 머무를 때 그분한테 분에 넘치는 사랑과 지도를 받았습니다만 늘 마음으로 감사할 뿐 제대로 보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김 교수님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분 처가 쪽 조카딸과 혼인까지 권유하셨다면서 그 사이에 결혼을 했는지 궁금해 하셨어요.” “그분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교수 임용도 되기 전이었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아 그런 명문가 규수를 아내로 맞을 수가 없었지요.”

 

그럼 아직까지...” “하하, 혹시 제게서 노총각 쉰내라도 나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조금도 그런 티가 나지 않으세요. 젊게 보이는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특별할 건 없습니다. 그저 쌀밥에 김치와 된장찌개를 즐겨 먹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게 비결 아닌 비결이지요.” “소식(素食)하는 식성이 저와 아주 비슷하세요. 일본에 오시면 식사대접하기가 수월하겠어요.”

 

그때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그 틈에 그가 편지를 읽었다. “선생께서 고노에님 기차여행의 안내를 특별히 부탁하셨네요. 어떻습니까, 내일 기차여행을 하시겠습니까?”

 

저야 좋지만... 선생님께 너무 폐를 끼치는 것 아닌지 두렵습니다.” “실은 히라타 선생께선 저더러 이런 미인과 언제 기차여행을 하겠느냐고 고마운 줄 알고 깍듯이 모시라 하셨습니다.”

 

어머, 저더러는 김 교수께서 고품격의 노총각이니 흉잡히지 않게 조신하게 굴어 좋은 점수를 따라고 주의를 주시더니...” “어쨌거나 나중에 일본에 가서 선생을 웃는 낯으로 뵙기 위해서라도 안내역을 충실히 수행해야겠는 걸요.”

 

그가 웃으며 안내할 뜻을 비쳤다. “감사합니다. 염치없지만 호의를 받겠습니다.” 그미가 기쁨이 담긴 눈을 실어 가벼운 목례를 보냈다. “, 그러면 어디로 모시면 좋겠습니까?” “하룻길로 다녀올 수 있는 시골역이면 좋겠습니다만.”

 

불분명한 불가사의한 의문을 느꼈다.

 

그런 곳이라면 마침 생각나는 데가 한 군데 있습니다. 서울, 경기, 충남, 전북을 이어 달리는 장항선 기차노선에 있는 청소라는 간이역인데 그 나이가 미수에 가깝습니다.” “어머, 미수라면 팔십팔 세나요? 마치 먼 시골에 사시는 외할머니를 찾아가는 것 같겠네요. 거기에 가고 싶습니다.”

 

그러시죠. 한데 기차는 느린 것으로 선택해야겠지요?” “자상하세요. 기차여행 마니아는 급행을 타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는군요.” “그러면 시발역인 용산역에서 10시 반에 출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용산역으로 나가겠습니다.” “여기서 역까지는 택시로 십여 분정도 걸릴 것입니다. 택시정류장에서 조금만 역사건물 입구로 접근하면 보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오면 대합실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친절도 하셔라, 그미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튿날 오전 용산역으로 나간 그가 10시쯤 매표를 마치고 출입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그미가 나타났다. 그를 발견한 그미가 반색을 하면서 허리를 굽혀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를 건넸다. 청바지와 아이보리 색 티셔츠에 엷은 검정 스웨터를 걸치고 흰 운동화를 신은 그미의 차림은 구김살 없는 청년 같아 보였다.

 

어서 오세요. 여행하기에 좋은 날씨입니다.” “한국의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더니 정말 눈부시군요. 저 들려오는 안내방송 소리가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하는군요.”

 

대합실로 들어가서 커피라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 열차 안에서 먹을 점심도시락을 사고 싶은데 상점이 있겠지요?” “이렇게 도시락을 준비해 왔는걸요.” 그가 도어를 밀치고 대합실로 들어서며 손에 들고 있는 꾸러미를 쳐들어 보였다.

 

그것마저 신세를 졌군요.” “치사하긴 아직 이릅니다. 이따 도시락을 펼쳐 보여드리면 아마 감동하실 겁니다. 도시락 안에 전혀 상상하지 못한 욕기여행용 조치개가 들어 있답니다.”

 

아이, 너무 궁금하군요. 욕기여행은 무슨 의미이고 조치개란 무엇인가요?” “열차가 출발한 후에 풀어 낼 이야기 거리 보따리를 설마 여기 대합실서 풀라는 건 아니시지요?”

 

자꾸 애만 태우시는 게 선생님은 생각보다 장난꾸러기이신가 봐요.” “웬걸요. 장난꾸러기가 아니라 귀한 손님의 파적을 책임진 충성스런 이야기 꾼이지요. 자 저기 커피숍으로 가시지요.”

 

그미가 모카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서 모카커피를 그에게 건넸다. 그들이 커피를 마시고 났을 때 개찰을 알리는 방송이 들렸다. 열차는 정각에 출발했다.

 

겉이 우중충하니 촌스러워 보인데 비해 객실은 깔끔해서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그미는 낯선 동행자들의 기웃거리는 시선이 교차하는 객실의 상투적인 분위기와 전혀 다른 그러한 느낌에 자신과 버성기고 있는 어색함과 긴장감을 털어버리 듯 밝은 표정으로 앞장 서 좌석을 찾아갔다.

 

열차가 출발한 후 그가 잠금쇠를 풀고 앞좌석을 돌려놓고 그미와 마주해 앉았다. 처음 둘의 시선이 맞선 무릎 사이 공간 위에서 마주쳤을 때 그미는 살가워진 미소를 지었다. “시골 간이역에 서는 완행열차의 친근 냄새가 나서 좋아요.”

 

이 열차가 열네 번째로 서는 역이 청소(靑所)역인데 거기까진 두 시간 사십 분 가량 걸립니다. 청소역 도착이 오후 한 시경이니 열차 안에서 점심을 도시락으로 먹는 맛과 멋을 함께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양수 겹장 탐미라니 참으로 치밀하시군요. 일등 가이드세요 정말.” “해서 아까 욕기여행이라고 한 겁니다.” “처음 듣는 용어인데 한문으로 어떻게 쓰나요?” 그가 작은 수첩을 꺼내 浴沂라고 써서 보여 주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말 같아요.” “그렇습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취향을 물었을 때 한 제자가 한 대답에서 비롯된 말인데 세속적인 명리를 잊고 유유자적한다.’는 비유로 쓰입니다. 오늘의 이 기차여행이야말로 욕기여행이라 할 수 있잖을까 싶어서요.”

 

정말 멋진 묘사이군요. 그렇다면 조치개란 더 감동스러운 사물이겠네요.” “미안합니다. 그건 아직 밝힐 때가 아니어서... 대신에 이제부터 차창에 뜨는 풍광파노라마를 보면서 무엇이고 질문을 하시면 제가 변사 노릇을 하겠습니다. 무성 파노라마로 즐기실 양이면 눈 호사만 따라가시고요.”

 

알겠습니다. 친절하신 변사님.” 천안까지의 연도 풍광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미가 천안 어름에서 경부선을 버리고 예산 방향으로 장항선을 타기 시작하면서 변사님!’ 하고 그를 불러 여기가 어딘가 묻는가하면 엉뚱하게 옛 백제 땅인지를 묻고는 했다.

 

그리고 짚 지붕을 인 농가를 볼 수 없는 게 아쉽다고 했으며, 향촌 풍정이 어쩌면 일본과 저리도 빼닮았는지 모르겠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그미는 한국에 대해 비교적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 보였는데 특히 백제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미가 유독 관심을 보여 질문을 많이 한 것은 대부분이 간단히 답변하기 곤란한 백제의 역사와 관련된 지리에 관한 것이라서 당장 긴 설명을 하기가 어려워 후일을 기약하며 미뤘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그미에게 뭔가 형태가 불분명한 불가사의한 의문을 느꼈다. 그건 앞으로 그들 사이에 얽힐 숙연(宿緣)과도 같은 한바탕의 인연 극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 한 꼬투리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영역에 설핏 날린 신비한 새의 한 깃털 자국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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