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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민족혼 일깨운 ‘知行合一 선각자'
<스페셜> 보훈의 달 맞아 “김상옥 의사 재조명”(제1부)
기사입력  2013/05/29 [18:19] 최종편집    김영실 박사
▲ 샛별처럼, 국운 쇠퇴기의 위대한 영웅 '김상옥 의사'

김상옥(金相玉) 의사(義士)는 일제의 압박 밑에 나라가 신음하고 있을 때, 의병, 애국계몽운동, 3.1운동, 임시정부, 의열투쟁, 독립군, 국내항일, 학생운동, 자금조달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민족혼을 치열하게 일깨우며 뜨겁게 그 불을 지피었다.

김상옥의사는 3.1운동과 같은 민주적 평화 시위로는 일제를 물리칠 수 없음을 깨닫고, 의병 출신들과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으며, 의병전쟁(1894-1915)의 맥을 이은 1910년대 대표적 항일 투쟁의 선봉 역할에 핵심 인물이었다.

지난 5월 9일 가톨릭대학교 음악 전공학생들이 자작곡 ‘봄은 간다!’로 ‘김상옥의사’ 일대기를 생생히 알린 뮤지컬을 공연한바 있다. 비록 그의 나이 34살의 짧은 생애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화산처럼 장렬히 산화하였지만, 보훈의 달을 맞아 다른 독립투사에 비해 숨겨진 진주 김상옥의사의 재조명은 후대 귀감의 표본으로 삼는데 일절 손색이 없을 것이다.

▲ 김상옥(金相玉)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 동대문 어의동(지금의 효제동 72번지)에서 영문포수(營門砲手) 아버지 김귀현과 어머니 김점순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 국운 쇠퇴기의 ‘샛별처럼’ ‘김상옥’

▲ 일제 압제하의 숨겨진 '진주 김상옥의사'    
백의(白衣)의 선비 나라 조선, 동방의 예의지국, 동쪽의 해 뜨는 나라-이러한 숭고한 명칭처럼, 우리는 오랜 역사 동안 고고한 선비의 정신을 이어온 아름다운 나라이다.

외국과 싸움을 하기엔 약한 지형을 가져서인지,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의 단 한 번의 외침을 빼고는, 항상 약하게 외부의 침입만을 당해야 하므로 슬픈 이야기를 갖고 있다. 크고 힘센 동물이 약하고 뛰지 못하는 동물을 먹이로 삼는 것처럼, 인간 역사도 그렇게 이루어져왔다.

이 작은 나라가 외침을 당하면 금은보화와 농산물을 바치는 것은 기본이고, 귀중한 보물 보다 더 귀중한 선비들의 서적들도 거의 빼앗겼다. 시집가지 않은 고운 딸들을 침략자들의 손에 내주어야 했으며, 심지어 어린 사내의 성기를 잘라 바치라는 끔찍한 명령도 받았던 약하고 약한 나라였다.

이제 유럽의 20세기의 거스를 수 없는 큰 변화가 조선의 땅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었지만, 마지막 황제인 고종과 민비의 목을 죄는 일본의 만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그로 인해 조선은 빛나는 하얀 색을 잃어만 가고, 아직 문명이나 글도 깨우치지 못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며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 올곧은 조선군관 출신의 ‘비범한 아들’

이렇게 나라의 운세가 기울어지고 있던 1890년 1월 5일, 한지(漢䓌) 김상옥(金相玉) 의사 (1890∼1923)는 서울 동대문 어의동(지금의 효제동 72번지)에서, 가난하지만 성품이 올곧은 조선의 군관으로 오늘날 육군 장교격인 영문포수(營門砲手. 영문을 지키는 군인) 아버지 김귀현과 어머니 김점순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 김상옥 의사 3형제  가족. 왼쪽에서 두번째가 부인 정진주여사.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큰형도 잃는 바람에, 어린 가장이 된 김상옥은 가난한 집안을 이끌어야 했지만,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아버지를 닮은 무관기질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인지 성품이 영특하고 몸이 단단하여 무인 기질을 갖은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모험놀이를 좋아하였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뜻을 굽히자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여 어른들의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집 주위에 있는 낙산과 남산, 북한산등 산타기와 달리기, 주먹 다지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체력을 단련하여, 당찬 몸매와 날렵한 행동으로 강력한 체력을 다져 백발백중 사격술을 만들어 내었고 능숙한 변신술에도 능통하였다.

또한 의사는 정의감과 모험심이 강했고, 과단함과 대범한 성격으로 사람들의 리더가 되었으며, 상황판단 능력이 뛰어나고 대처능력이 탁월하며, 불의에는 물러설 줄 모르는 기상으로 애국정신을 빛내신 분이셨다.

그는 일찍이 광복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헌병대를 기습했던 일이나, 상해에서 거사를 위해 국내로 잠입 할 때는 농부로 변장하는 등, 압록강 철교위에서는 경비를 맡은 경찰과 세관 관리 등을 혼자 물리치는 대단한 무인의 기질을 발휘하는 그의 이름 앞에, 일경은 떨었다.

▲ 지난 5월 9일 가톨릭대학교 음악 전공학생들이 자작곡 ‘봄은 간다!’로 ‘김상옥의사’ 일대기를 생생히 알린 뮤지컬을 공연한바 있다.   


● “어머니! 저 3년만 공부시켜 주세요!”

지금부터 120년 전, 우리나라에 가난하지 않은 가정이 어디 있었겠냐만, 부친을 여읜 김상옥 소년의 집안도 가난하기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으며, 나아가 가정을 돌봐야 하는 어린 가장이 되었고, 빼앗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선 무언가 일을 해야만 하는 피 끓는 청년이었다.

아들의 장렬한 최후를 접한 어머니는, 피 토하는 비통한 울부짖음 속에 이렇게 사연을 전하였다.(제2부와 제3부에서 後述)

‘집안이 가난하여 상옥이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8살 때부터 직공이 되어 가정의 생계를 이끌어 갔지요. 그 애가 자랄 때 옷도 제대로 못 입혔고, 밥도 제대로 못 먹였으며, 매일 메밀 찌꺼기와 엿밥으로 자라났지요.

▲ 1998년 5월28일,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 건립된 김상옥의사 동상 
어려서부터 공부가 하고 싶어서, “어머니, 나 3년만 공부시켜 주세요.”라고 울며 애원했건만, 그 원을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대장간에 가서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는데, 시간이 모자라 방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서서 퍼먹고 갈 때, 그저 어미가 할 수 있는 말은 ’체할라 체할라‘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자)

그 무렵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에 속해 있었고, 백성이 가지고 있는 이렇다 할 기술이나 기업도 없었다. 게다가 나라를 점령한 일본상인들의 착취에 가까운 부당한 거래로 말미암아 나라 경제는 더욱 어려워져만 갔고, 서민들의 생활은 점점 고되었다. 그래도 돈이 있는 무지한 사람들은 값비싼 일본의 물건 사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명품 물건을 사듯 자랑삼았다.

김상옥 소년은 17세 되던 1906년, 서울 어의동에 있는 ‘어의동 공립보통학교’(現 효제동의 효제초등학교)를 다니며 신교육을 받는 한편,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과 유몽을 배웠다. 당시에는 그 나이에 보통학교를 입학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가정형편 때문에 곧 그만두어야 했다.

 
● 일본을 이길 수 있는 힘 ‘基督敎’ 대 확신

▲ 이필주목사 기념비! 김상옥의사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였던 이필주(李弼柱)목사의 지도하에 함께 일하였다.
사학자 송상도(宋相燾)가 대한제국 말기부터 광복까지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전문적으로 다룬 그의 저서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김상옥이 “장부차세 안사구구(丈夫此世 安事區區 - 남아로 세상에 태어나 구구하게 살지 않겠다고 밝힌 기개(氣槪)를 칭송한바 있다.

1911년 4월에 22세의 김상옥 청년은, 막 우리나라에 들어온 YMCA(당시의 명칭은 경성 기독교청년회관)의 초대 청년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오랫동안 동대문감리교회에서 야학을 하면서 여러 가지 봉사를 하고 많은 사람을 도왔으나, 중학교 졸업도 못한 김의사가 청년부장으로 뽑힌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그의 용맹한 성품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탁월한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 주위 사람들의 호응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YMCA의 체육교사로도 재직하였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였던 이필주(李弼柱)목사의 지도하에 함께 일하였는데, 이 때 가까워진 인연으로 그들은 훗날 피를 나눈 동지가 된다. 후에, 이필주목사는 일경과의 투쟁으로 피신하여 다니는 김상옥 의사를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겨주기도 한다.

김상옥의사가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당시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은 이렇다.

그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김상옥 소년은 배움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여러 방면으로 공부할 길을 찾고 있었다. 때마침 우리나라에도 전파되기 시작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현재 동대문 옆에 있는 ‘동대문감리교회’에 입교한다.

김상옥은 교회에 다니면서, 반대하는 어른들의 매도 여러 번 맞았지만,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가 잘 사게 된 이유가 바로 기독교 문화 때문이며, 우리가 일본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키울 곳도 바로 기독교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래서 그의 나이 17세에는 동대문 감리교회에 ‘신군야학교’(信軍夜學校)를 세워 청년들을 모아 야독을 하지만, 재정난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20세가 되던 1909년 3월에는 학교에 못가는 불우 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자 ‘동흥야학’(東興夜學)을 설립하고 자신도 학생이 되어 공부했다. 그러나 낮에는 대장간에서 고된 일을 하며 틈틈이 책을 읽고, 밤에는 야학교를 운영하면서 자신도 공부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가 21세가 되던 1910년은 우리나라를 일본에게 송두리째 빼앗긴 해였다. 김상옥 청년은 그 해 경성 기독교 청년회관(YMCA)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곳에서 국제정세와 선진국 문화를 익히고, 또 앞으로 미국에 유학의 꿈을 품고 일제 타도의 길을 찾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먹여 살려야 하는 식구는 십여 명이 넘었기에, 학비 조달과 가정 살림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일은 힘에 겨웠다. 결국 그렇게도 희망에 부풀었던 영어학교 입학의 기쁨은 일 년이 못되어 접어야 했다.

어린 나이 8살부터 노동 전선에 들어서 낮에는 온종일 쇠망치를 두드리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밤에는 지친 몸으로 밤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남자가 세상에 나와서 어찌 구구하게 살랴! 한 번 세상에 나온 보람이 있게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며, 형편상 공부를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실망이나 좌절에 빠지지 않고 그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며, 스스로 영어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23살 ‘영덕철물점’ 사장…젊은 사업가 귀감

1912년 23살의 김상옥 청년은 직공에서 자활의 길을 만들어, 현 동대문 밖 창신동 487번지에 ‘영덕(永德)철물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 일을 동생 춘원에게 맡기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등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풍물과 견문을 넓히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만나 시국과 나라의 장래에 대해 토론하며 애국심을 계몽하고, 성경을 권서(勸書,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성경책을 파는 사람 : 편집자주)하는 한편, 의약품을 보급하였다.

▲ 망치질하는 철공장 시절의 김상옥의사    

그는 의약품을 사기 위해 모이는 군중에게 약품을 판매를 하고 기독교 전도를 한 뒤엔, 항상 국민을 계몽하는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몸에 있는 병을 고치려고 약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이 건강한 것으로만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위험에 빠져있습니다.자기 몸의 병을 자신이 잘 아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왜? 왜놈의 식민지가 되었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벙어리처럼 말을 못하고, 장님처럼 못 보는 척하십니까?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서로 다투지 말고, 함께 뭉쳐 애국심을 분발할 때입니다.”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그의 연설에 감동한 군중들은 오히려 약을 더 많이 사주었다. 다음 해인 1913년은 일제가 일본 헌병들을 배치하여 권서사업을 방해하고 예수교인들을 탄압하던 시기였으므로, 그는 신분을 감추고 매약행상(賣藥行商)으로 위장하여 지방에 몇 달씩 체류하였으나, 일제의 심해져만 가는 탄압으로 도시에서의 권서활동을 중단하게 되고, 결국 그가 운영했던 동대문서점도 문을 닫게 되었다.

▲ 비밀항일결사 ‘광복단’(光復團) 을 결성하다.   

그러나 그는 철물상 경영에서 큰 이익이 생기므로 용기를 갖고 사업을 펼쳐나갔으며, 한훈(韓焄, 후일 사돈이 됨), 채기중(蔡基中), 유장렬(柳璋烈)등을 만나 비밀항일결사 ‘광복단’(光復團)을 결성하며 전국을 누비며 맹렬한 활약을 하였다.

김상옥 사장은 약 판매와 권서 등에 힘입어 점점 생계가 부해지면서 1913년 10월에는 동대문에 2층집을 새로 짓고, ‘대동단’의 주역으로 활동한 동대문감리교회 장로 ‘정희종’의 장녀 정진주(鄭眞珠)씨를 신부로 맞아 결혼식을 올렸다.

정희종 선생은 흥인배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19년 11월 20일경 서울 창신동에서 대동단(大同團)원들이 연서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여러 종의 선언서 등을 인쇄하고 같은 달 27일 서울 일대에 배포하도록 전대진(全大振)에게 전달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편집자 주)

▲ 김상옥 의사와 함께 광복단을 결성한 한훈열사! 후일 사돈의 인연을 맺다.     
김상옥 의사는 한훈 열사와 혈서로써 맺은 동지애로서 후일 자녀를 낳으면 서로 사돈이 되자고 확약하였다. 이들의 숭고한 뜻을 따라 김상옥의사의 양자 김태운과 한훈열사의 외딸 한정수는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였지만 결혼식을 올린다. 한훈열사는 일제하의 감옥에서 19년 6개월을 지냈기에 그의 아들 한세택과 딸 한정수와는 20년의 나이 차이가 있다.

한편, 젊은 사장 김상옥은, 비싼 일본물품을 배척하기 위해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일으켰다. 일본의 단발령(斷髮令) 이후, 국민들은 모자가 필요했고 일본제 중절모 ‘나까오리’를 비싸게 사게 되었다.

이에 김의사는 가볍고 위생적이며 값이 싼 ‘말총모자’를 만들어 보급하였고, 당시 많은 사람들은 김의사의 애국정신을 높여 그 모자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는 또 소편자, 대갈(말굽에 편자를 박을 때 쓰는 징)과 농기구등을 정성들여 개발한 후, 크게 번성하여 그의 판매망은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직공들도 50명에 이르렀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공장에 나와 직공들을 위로하고 함께 일하며 가족처럼 지냈으며, 틈틈이 직공들에게 사회문제와 정신교육 및 애국심을 가르쳤고, 자신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서 문맹 직공들에게는 야학교를 다니도록 편의를 봐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 김상옥 의사의 모친 김점순여사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후, 어머님은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그렇게 어려운 집안을 제 손으로푼푼이 돈을 모아 동대문 안에도 집을 둘 짓고, 저도 장가들고 아우도 강가 들이고, 이 집도 짓고 그럭저럭 돈이 삼사만원 모였지요.”(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자) 그의 ‘영덕철물점’은 날로 번창하여, 그는 수만 원대의 재산을 보유하는 성공한 실업가가 되었었다.

언제나 의협심이 강하고 담대한 성격의 김상옥 청년은 돈에만 만족하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직공이 50여명에 이르자, 차츰 조직적 독립운동 활동을 시작하여 공인조합(工人組合)과 동업조합(洞業組合)과 같은 조직체를 만들어, 경영주들의 이익과 편의를 도모토록 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에도 힘을 썼다.

또한 그 모임을 통해 나라 독립에 대해 의논하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도 모색하였다. 이는 1910년대의 살벌한 일본의 통치 아래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대업이었으며, 당대 젊은이들이 생각이 미치지 못한 혜안이 깊은 선견적 리더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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